마가는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는 천사를 만난 여인들의 행동을 묘사하면서 “몹시”, “놀랐다”, “떨었다”, “도망했다”, “무서워했다”, “아무말도 못했다” 와 같은 수많은 충격과 관련된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러한 결말은 마가가 그 이름의 뜻대로 망치로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적인 선포로서 복음을 소개하려는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마가는 복음의 강력한 의미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증언 전반에 걸쳐서 자신만의 독특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것은 바로 극한 충격을 의미하는 “담베오”와 “에크담베오”라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소개하면서 첫 이야기로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신 후 귀신을 쫓으신 모습을 소개하는데, 귀신이 크게 소리 지르며 나가는 모습을 본 대중들의 반응을 소개할 때 이 단어를 씁니다(1:27). 이후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세 차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언급 하시는데, 여기서도 세 차례 이 단어를 씁니다. 예수님의 변형 사건 이후 세 제자들과 함께 산에 내려 오셨을 때 예수님의 모습을 본 이들의 반응(9:15),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는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10:24),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세 번째 언급 이후 예수님께 앞서서 예루살렘으로 출발하실 때 제자들의 반응입니다(10:32). 이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시고 사역을 마치신 후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큰 충격을 받으시는데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14:33). 마지막으로 여인들이 무덤에서 흰옷입은 한 청년을 보았을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16:5).
이처럼 증언의 맨 처음과 끝에서, 그리고 증언의 핵심인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 위에서 세 번의 걸친 죽음과 부활에 대한 언급과 맞물려서,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 직전 기도에서 이 단어를 씁니다. 극한 충격으로 시작해서 극한 충격으로 끝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충격 끝에 결말을 남기지 않음으로써 충격을 받은 이들로 하여금 충격에 대한 반응을 스스로 찾게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마가가 결말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도 마찬가지로 복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충격적인 사건인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았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고 그분을 만나서 그 복음에 순종하는 것이 각자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독자로 하여금 복음의 충격 앞에서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B. 후대에 첨부된 결말
· 막16:8-11,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 주시고, 제자들은 그녀를 불신 (요20:11-18 )
· 막16:12-13,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만남, 제자들은 두 사람을 불신 (눅24:13-35)
· 막16:16, 믿고 세례받는 자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자는 정죄를 받으리라 (행2:41)
· 막16:17, 믿는 자들이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새방언을 말하는 표적이 일어남 (행2:1-4, 행10:44-48, 행5:16, 행8:6-7, 행16:16-18, 행19:1-7)
· 막16:18, 뱀을 잡고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고 손을 얹은즉 병이 나음 (행28:1-10)
· 막16:19-20, 승천하신 후 제자들을 통해 전파된 말씀을 표적을 통해 확증해 주심 (눅24:50-53, 행1:9-11, 행2:1-13, 행2:43, 행3:1-10, 행4:31, 행5:12-16, 행8:6, 행9:32-42, 행10:44-48, 행14:3, 행16:26-32)
결론에 해당하는 16:9-20절의 말씀은 학자들 사이에서 저자 마가의 글인지 아니면 후대에 첨가한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사본에 따라 첨부 여부가 다를 뿐만 아니라 각 사본에 대한 신뢰도의 문제까지 연결되어 난제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글의 구조와 내용을 분석해 보면 원 저자인 마가의 글은 16:8절까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먼저 내용 자체가 이어지지 않습니다. 16:8절의 마지막 헬라어 단어는 접속사 “왜냐하면”인데 이어지는 9절이 ” 왜냐하면” 이라는 접속사로 연결되지 않는 전혀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라는 접속사는 보통 문장의 앞에 와야 하는데 의도적으로 뒤에 배치하는 문학적 기법을 통해 열린 결말을 독자들에게 남겨서 결단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한편 이미 앞에서 세 번이나 언급했던 막달라 마리아를 9절에서 다시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점, 16:8절까지 마가가 “그리고”라는 단어를 한 절에 한 번 정도로 매우 빈번하게 사용하지만 16:9절 이하에서는 두 번 밖에 등장하지 않는 점, 그리고 예수님을 기록함에 있어 16:19절에서만 유일하게 “주 예수”라고 기록한 점 등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줍니다.
따라서 16:9-20절의 말씀은 성경의 독자들에게 이 충격적인 복음의 이야기가 그 이후에 어떻게 전파되었고 세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려주고자 후대에 요약해서 첨부한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첨부된 내용은 다른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있는 내용들을 요약해 놓은 것으로서 성경의 다른 책들과 대치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마가의 증언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오히려 저자의 의도대로 결론 없이 끝나는 것이 복음의 충격성과 급박성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저자 마가를 통해 복음이 얼마나 놀랍고 충격적인 하나님의 은혜 이야기이자 변화된 삶으로의 초청 이야기인지를 전하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